[스크랩] 사후 세계가 있다고 했을 때 가는 방식이 궁굼하다
사후 세계가 있다고 했을 때
최희철
사후 세계가 있다고 했을 때 과연 누가 어떻게 그곳으로 가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먼저 가는 방식이 궁굼하다. 여기서 어디론가 가는게 아니라 지금.바로 그 자리에서
어떤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나는지 더 궁굼한것은 지금의 자신과 동일한 자신이 가는
것인지 (그게 영혼이든 뭐든) 아니면 조금 변한 자신이 가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후 세계로 갈 자신의
대표적 상징이 만들어져서 가는 것인지.
그런데 과연 지금의 자신은 57년 전의 자신과는 어떤 관계일까? 처음의 자신을 A1 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자신은 A 57쯤 될 것인데 A57은 A1이 하나도 변하지 않으면서 된것은 아닐
것이고 A1부터 시작하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A57이 되었을 것이다.
그럼 사후세계로 가는 A는 과연 누구일까? A1인가" 죽기직전 즉 An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A1부터 An까지의 평균값?인가. 이런 방식은 대부분 "실체론"이다.
지금과 동일한 자신이 사후세계에 가서 행복하게 그것도 영원히 잘 살거라는든지 아니면
그곳에서 동일한 자신이 다시 태어나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산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애초에 이런 구도를 설계? 한 사람의 머릿속에 있던 사후 세계는 이런 게 목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지금 살고 있는 삶대로 잘살게 할 목적으로 이런 구도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른바 "도덕"을 통한 "당근과 채찍이다. 그게 전해 내려오던 중에 극심하게 "왜곡"된 것이리라.
그 왜곡을 가리기 위해 "초월적 믿음"이란 게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초월적 믿음"을 요구하는 것은 나중에 벌어질 사태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을 지지
못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내게 죽음에 대해 묻는다면 모두가 죽으면 "물질"들이 될거라고 말하겠다.
기억의 간격이 거의 없는 박편(薄片) 같은 물질 말이다. 작아도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거나
양적 개념으론 표시할 수 없는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질적인 그 어떤 것 말이다
잘게 나누어진 기억들은 아무리 잇고 종합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不可逆)
세계라고나 할까?
하지만 죽음 현상만 그럴까? 우리의 일상도 그렇지 않을까? 사실 죽음을 걱정하는 것은
아주 유치한 짓일 수 있다. 나이트클럽에 들어가자마자 집에 갈일을 걱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인간들 간의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그걸 멈추기 위해 복수할수 없는 "희생물"이 필요하다.
그래야 복수의 반복이 멈춰지는데 희생물 자신은 물론 희생물의 동족들도 복수할 수 없어
야 하는 존재이므로 희생물은 "하찮게 여겨지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희생물이 되는 순간 "성스러워 진다.그걸 부여하는 힘으로서의 "공권력이 그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권력은 반드시 "희생물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죽음도 "양의 머리(희생 재료)
처럼 취급되는 것이 안타깝다. 그걸 통해 공권력이 생겨나는데 "목숨주의자"들이 죽음을
대할 때처럼 인민들이 상황에 마취되어 있을 때 은근 슬쩍 탄생하는 것 같다
혹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죽음도 저렇게 이용되는 것은 아닐까?
위대한 죽음"들은 자신의 추모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산 자들에 의해 "희생-성스러움
의 관계와 짝패로 만들어진다.
그것은 본질에 대한 우리의 허망한 도전 때문으로 보인다"마치 존재하지 않는 왕국을 꿈꾸는
것처럼 말이다.
허망한 검은 구멍을 메워줄 그 무엇이 필요한 것 때문에 자유로운 물질이 되어야 할 진정
위대한 "죽음"들이 "희생물로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그게 아마도 우리가 갖고 있는 사후세계에 대한 초월적 믿음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웃기는 현상도 아니지만 그리 엄숙하거나 침울한 현상도 아니다.
그저 "차이가 반복"되는 또 다른 현상일 뿐이다.
삶의 욕구에 의해서 구동되는.
최희철
사진으로 생각하고 철학이 뒤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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